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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2. 12世 〉7. <요재공>송탄공휘익겸충효기적비문(松灘公諱益謙忠孝紀績碑文)
1. 문헌 목록 〉12. 12世 〉9. <부정공>선교랑공휘탁묘지명(宣敎郞公諱晫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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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통덕랑공휘의길묘갈명(通德郞公諱義吉墓碣銘)
通德郞公諱義吉墓碣銘 公姓趙氏諱義吉字吉之系出玉川以麗朝檢校門下侍中諱璋爲上祖三傳而諱元吉號農隱封玉川君諡忠獻享武夷院生諱瑜號虔谷典農寺副正見麗社屋遯于杜門洞述志曰首陽山月照我心肝太宗嘉之曰趙瑜有採薇之志 世宗朝 命旌其門享謙川祠杜門洞院盖 列聖褒揚勝國守節之臣者爲其勵廉耻而敦風節也又二傳諱智崑縣監篤于壎箎作一榭而併處其中顔其楣曰相好載勝覽公之五世以上也高祖諱和司直曾祖諱介臣監察祖諱大承縣監考諱珏訓錬奉事蘊抱才知未見伸而卒妣宜人泰仁許氏府事縉女公生于 宣廟壬寅三月十日禀質明通志氣磊落天性忠孝甫五歲遭奉事公憂以未及供歡膝下親顔依俙爲平生至慟每於諱日哀同袒括或有氣塞享需躬檢務潔日必晨起拜廟月朔望不廢展墓其終身之慕可知也事母夫人極孝承顔順志有不安節則禱天甞藥多獲神明所佑得以勿藥天人於公是訓是彝能世其家賢乎哉公讀史至古人忠義感奮詠嘆値丙丁之禍從鄭公弘溟與縣監安瑢族子時一時述時聖元謙妹婿安時稷糾合義旅自礪山至淸州軍聲大振聞和成痛哭罷兵而歸事載湖南節義錄居家敎子孫嚴而有法御藏獲恩而有戚内行純備丁内憂柴毀幾殊號痛無節兼爲父喪未伸情禮故也見者傷之公之卓行至孝士林狀之守宰薦之昭著郡誌以天年卒于某年十二月三十日藏于順天住巖面蘆洞山坐酉之原齊恭人木川張氏參判弘迪女忠毅公潤孫女生于庚子八月九日歿于某年五月十七日祔公墓育二男二女時耈時鼎女慶州李漢伯柳俰妻孫維春維夏維憲許援張恃金煥張㤚妻長房出維城次房系子李以苾李婿系子維春男光耘東耘相耘成耘維城男儻進士有文行餘繁不記人生於天地之間所性者忠孝之外無他物惟此先立以後萬善備矣謝疊山曰爲人臣不盡孝於家而能盡忠於君者未之有也爲人君不敎人以孝而能受其忠者亦未之有也此内要言要道也公涵育於 列聖二百年培養之餘講此道而不失其正嗚呼偉哉公之九代孫炳寬文學愷悌之士也將修公墓道請余隧石之文如既慕公之遺風且感君之惻怛不辭是役按狀叙之爲之銘曰 矯矯趙公篤生名家惟忠惟孝克彰邇遐捨命赴難直節卓犖功雖未就名聞漢朔尚論今古如公有幾玉雪其姿學邃行韙丹砂空靑所遇逼仄道峰峨我錄不泐 驪興 閔丙承 撰 통덕랑공휘의길묘갈명(通德郎公諱義吉墓碣銘) 공의 성은 옥천 조씨요, 휘는 의길(義吉)이며, 자는 길지(吉之)이다. 건곡 선생 휘 유(瑜)의 후예로 고의 휘는 각(珏)이요, 벼슬은 훈련원봉사인데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떴으며, 비는 의인 태인허씨(泰仁許氏) 부사(府事) 진(縉)의 딸이었다. 공은 선묘(宣廟) 임인년(一六○二) 三월 十일에 출생하였는데 자질이 밝게 통하고 지기가 활달하여 천성이 충효하였다. 나이 겨우 五세때 봉사공의 상사를 당하였기 때문에 슬하에서 기쁘고 봉공을 못하였고 어버이 얼굴이 희미함으로써 평생 동안 슬퍼하며 언제나 제삿날이면 초상 때 같이 슬퍼하여 혹 까무라친 때도 있었다. 제수는 몸소 간검하여 항상 정결히 하였고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참알하고 달마다 삭망에 성묘했으니 그 몸이 다하도록 추모했음을 가히 알겠도다. 모부인을 섬기며 지극히 효도하여 안색을 화이하게 하고 뜻을 순하게 하며 혹 편안하지 못한 기색이 있으면 하늘에 빌고 약을 맛보아 많이 신명의 도움을 얻어 효험을 보니 부인이 공의 이 효도를 본받아 그 집을 이으니 어질도다. 공이 사기를 읽으며 옛 사람의 충의한 곳을 보면 감분 연탄하더니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정홍명(鄭弘溟)을 좇아 현감 안용(安瑢), 족자 시일(時一), 시술(時述), 시성(時聖), 원겸(元謙), 매서 안시직(安時稷)과 더불어 의병을 규합하여 여산으로부터 청주에 이르니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으나 화의가 성립됨을 듣고 통곡하여 돌아온 사실이 호남절의록에 등재되었다. 집안에 거하며 자손을 교도함이 엄하고 법도가 있으며 노비를 거느림이 은혜롭고 위의가 있고 내행이 순비하였다. 모부인의 상사를 당하여 가시같이 헐어 거의 죽게 되도록 애통해 한 것은 부친상에 정예를 펴지 못한 것을 겸한 때문이니 보는 자마다 슬퍼하였다. 공의 높은 행실과 지극한 효도를 사림들이 글을 올리고 수령이 장천한 사실이 군지 (郡誌)에 소상히 등재되었다. 천년(天年)으로 十二월 三十일에 별세하여 순천 주암면 노동산(蘆洞山) 유좌 언덕에 안장하고, 배는 공인 목천장씨(木川張氏)로 참판(參判) 홍적(弘迪)의 딸이요, 충의공(忠毅公) 윤(潤)의 손녀인데, 경자년 八월 九일에 출생하여(연대는 미상이다) 五월十七일에 별세하니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남은 시구(時耈), 시정(時鼎)이요 여는 경주(慶州) 이한백(李漢伯) 유화(柳俰)의 처 이며, 손자 유춘(維春), 유하(維夏), 유헌(維憲)과 허원(許援), 장시(張恃), 김오(金墺) 장행(張㤚), 처는 장방출이요, 유성(維城)은 차방계자이며, 유춘(維春)의 남은 광운(光耘), 동운(東耘), 상운(相耘), 성운(成耘)이요, 유성남당(維城男儻)은 진사로 문학과 행의가 있었으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사람이 처진 사이에 지킬 바는 충효 밖에 다른 일이 없으니 오직 이를 먼저 세운 연 후에 만 가지 선(善)이 갖추어진다. 사첩산(謝疊山)이 가로되 「사람으로서 신하가 되어 집에서 효도를 다하지 아니하고 인군에게 충성을 다한 자 있지 아니하며 인군이 되어 사람을 효도로써 가르치지 아니하고 그 충성을 받는 자 없다」 하였으니 이 말이 요긴한 말이요, 요긴한 도리로다. 공이 열성조(列聖朝) 二백년 배양한 여택에 젖어 생육하여 이 도를 강마하고 그 바른 길을 잃지 않았으니, 아, 거룩하도다. 공의 九대손 병관(炳寬)은 문학이 유여하고 공근(恭謹)한 선비이라 장차 공의 묘도를 세우기 위하여 나에게 묘갈명을 청한다. 내가 이미 공의 유풍을 추모하고 또 군의 성의에 감탄하여 사절하지 아니하고 행장을 살펴 새겨 가로되, 우뚝한 조공이 독실한 명문에서 생장하였더니 矯矯趙公篤生名家 공의 충성과 공의 효도로 원근은 밝았네. 惟忠惟孝克彰邇遐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란에 나아가니 곧은 절개가 높이 뛰어났다.捨命赴難直節卓犖 공은 비록 이루지 못하였으나 이름은 한성까지 들렸네. 功雖未就名聞漢朔 옛과 이제를 놓고 보더라도 공 같은 이 몇 사람이나 되랴. 尚論今古如公有幾 흰 옥 같은 그 바탕에 깊은 학문 바른 행동이어라. 玉雪其姿學邃行韙 주사와 공청석으로 대우한 바가 가깝게 흐르니 丹砂空靑所遇逼仄 도봉이 높고 높아 내가 기록한 것이 희미하지 아니하리로다. 道峰峨峨我錄不泐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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